생명사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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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의사수필문학상 동상 수상작 '천사가 건네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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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생명사랑기금 작성일19-04-16 17:17 조회2,3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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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련 꽃 핀 어느 봄날

    창문 너머로 흐드러지게 핀 목련꽃의 그윽한 향기가 솔솔 불어오던 어느 봄날, 공손한 말투와 고상해 보이는 외모를 가진 50대 중년의 여자 환자가 진료실을 찾아왔다. 수년간 자궁경부암으로 치료받아 왔으나 이제는 더 할 치료는 없지만 회음부의 상처가 너무 아프니 도와달라고 했다. 병변을 살펴보니 돌덩이처럼 단단해져 정상적인 구조를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심각했다. 빈혈이 심해 수혈을 하고 통증을 잡으려고 진통제를 처방했다. 그 환자에게 상처를 관리하는 요령을 알려드리고 몇 주에 한 번씩은 병원에 나오셔서 경과를 관찰하자고 말씀드렸다.

     

    이렇게 뵙기를 서너 번 했을 즈음에 먼저 떠나신 남편 분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4년 전 남편은 폐암으로 3년간 투병하다 천국으로 가셨다고 했다. 남편이 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 쉼과 회복의 시간을 가져야 할 시간에 부인은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게 되었다. 하혈이 있어서 진찰을 받아보니 자신도 암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밤잠도 제대로 못 자며 식사도 걸러 가며 수년간을 헌신적으로 살아온 결과가 암이 라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안타깝게도 병원에서 권하는 모든 치료를 잘 이겨냈음에도 2년 후 재발이 되어 이제는 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부인은 때로는 너털웃음으로 때로는 글썽이는 눈물로 그녀의 지나온 이야기들을 쏟아내었다. 

     

    이렇게 곱고 아름다운 분이 그간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애달파져 더 공감하게 되고 드릴 수 있는 모든 위로의 말을 전하곤했다.

     

    헤매는 나의 마음

    부인의 병세는 날로 악화하였고 진료실을 찾던 발걸음도 뜸해져갔다. 급기야는 한 달이 넘도록 안 오시기에 혹시 이미 천국에 가신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되기도 하고 하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진료 기록지에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전화 수화기 저너머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있었다.

     

    “다리가 많이 부어서 움직이기가 어려워 병원에 못 갔어요. 요즘 많이 어지러워져서 빈혈 검사를 위해서라도 한번 가긴 해야 하는데…….”

     

    이분의 어려운 사정을 들으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환자가 못 오시면 내가 가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환자 댁을 직접 방문한다는 것이 선뜻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환자의 안타까운 표정이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뭔가 묵직한 것이 마음에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제가 오늘 저녁에 혈액 검사할 준비를 해서 댁에들르도록 해보겠습니다.”

     

    그 집은 병원과 인접한 도시에 있는 15평짜리 아파트였다. 치료비로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리고 공기도 좋고 병원에 다니기도 좋은 곳을 찾아 그곳으로 이사를 온 것이라고 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현관문이 활짝 열리며 밝은 미소로 그 부인이 나를 맞아주셨을 때 망설였던 발걸음을 채근해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담하고 정갈하게 정돈된 살림살이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부인의 깔끔한 성품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간단하게 진찰을 하고 부인의 혈액을 채취하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시더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며 고마워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나오려는데 아는 친척이 재배한 버섯이라며 분홍색 보자기에 쌓인 조그만 상자를 건네주시면서 그녀는 몇 번씩이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도 챙겨주시는 그 부인의 고운 마음이 내 마음에 마주치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조금전만 해도 갈까 말까 고민하면서 애써 외면하려고도 했었는데 이런 인사를 받고 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의사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병약한 환자들에게 나는 얼마나 따뜻한 말한마디와 부드러운 손길을 건네 왔었는가? 필름이 돌아가듯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환자를 긍휼히 여기는 진실한 마음이 얼마나 귀한가?

     

    청진기 너머의 소리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부인은 이제 의사로서 치료해야 하는 한 환자만이 아니라 마치 오래된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몇 가지 소소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도 기쁨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몇 주가 지나 그분이 우리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뒤숭숭해 바쁘다는 핑계로 며칠이 지나서야 찾아볼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잠든 그녀의 앙상한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 내가 찾아온 것을 알고사력을 다해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띤 채 그 가냘픈 손을 내밀어 한참 동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저에게는 최고의 선생님이셨어요. 저를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웃으면서도 그 환자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그런 말을 들을 자격도 없는 나를 세워주시고 격려해주시는 그분의 마음이 느껴져 순간 감정이 북받쳐올라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 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뿐이었다.

     

    열흘쯤 지났을까? 그분은 결국 남편분의 뒤를 따라 천국으로 떠나셨다. 그분의 착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하나님은 어찌 그리도 그분을 그렇게나 빨리 데려가셨을까? 며칠 후 학생이었던 그분의 두 딸이 음료수를 사 들고 진료실을 찾아왔다.

     

    “가족도 없는 저희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그분이 떠나기 전 내게 내밀었던 하얀 손의 여운이 내게로 몰려왔다.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이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밖을 바라보니 초가을의 파란 하늘 속에 펼쳐진 찬란한 햇빛이 나를 보고 미소 짓는 듯하였다. 그 부인은 내게 아주 위대한 선물을 주고 가셨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많은 환자가 이제는 그분과 같이 친구의 자리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청진기로 듣는 것이 이제는 병을 찾아내기 위한 소리만은 아니다. 심장박동 너머로 들려오는 그들의 삶의 소리, 그 호흡과 인생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존중과 사랑으로 진솔하게 빚어진 내 마음이 환자의 마음과 맞닿는 것, 눈동자를 마주하고 서로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

     

    마치 천사처럼 얼굴 가득 번져있던 그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니다. 아마도 나에게 깨달음을 주시려고 보내주신 천사였나 보다. 그 봄, 저 문의 열린 틈으로 꽃향기를 담고 다가온 천사의 아름다운 선물을 받았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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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이채영 샘통합암병원장 (G샘병원 종양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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